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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여러모로 다양한 레떼르와 층위를 지닌 분임을 알 수 있는데,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이랄까 지점을 차지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글도출판사가 펴낸 『춘원의 중단편선』은 그런 측면 즉 춘원과 종교와의 관련성이라는 문제를 중요한 모티브로 해서 엮은 책입니다. 현대사회와는 달리 근대사회는 신성기반문화의 재탈환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유효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특별히 식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실제로 서구로 대표되는 식민본국에서는 과학주의에 입각하여 ‘신의 죽음’을 논하며 도덕적 타락에 함몰되는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던 반면, 식민지국에서는 전통적 신성에로의 회귀라든가 식민본국으로부터 유입된 신성기반의 문명에 의지하..
춘원은 여러모로 다양한 레떼르와 층위를 지닌 분임을 알 수 있는데,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이랄까 지점을 차지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글도출판사가 펴낸 『춘원의 중단편선』은 그런 측면 즉 춘원과 종교와의 관련성이라는 문제를 중요한 모티브로 해서 엮은 책입니다.
현대사회와는 달리 근대사회는 신성기반문화의 재탈환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유효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특별히 식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실제로 서구로 대표되는 식민본국에서는 과학주의에 입각하여 ‘신의 죽음’을 논하며 도덕적 타락에 함몰되는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던 반면, 식민지국에서는 전통적 신성에로의 회귀라든가 식민본국으로부터 유입된 신성기반의 문명에 의지하여 도덕적으로 더욱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구로 대표되는 식민본국에서는 신성문화가 얇아지고 있는 반면, 식민 당하는 식민지 여러 나라에서는 외려 그 반대의 양상을 보였다는 것은 주목을 요하는 일입니다.
춘원은 이와 같은 사정을 당시 실제 식민지배 당하는 상황하에서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춘원은 1939년인가 그의 『육장기』라는 꽤 긴 단편에서 이와 같은 본심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독립운동을 하고 교육사업도 하고 민족계몽운동도 해 왔지만 그게 다 헛것이야. 거기에 하나님이 없으면, 부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하나님이 있어야, 부처님이 있어야 그래야 의미가 있고 완성이 되는 거란 말이지. 아니면, 그런 건 다 껍데기인 거야.」
뉴욕타임즈의 기자 프리드만은 그의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제2차 세계화 즉 제2차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것은 각 지역이나 나라의 전통이라고 하였는데, 그 전통의 핵심이 다름 아닌 신성기반의 문화를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세계화나 식민주의, 글로벌리즘에 대항하는 그리하여 그 시도를 무화시키는 핵심이 하나님이나 부처님으로 대변되는 신성문화 그 자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런 관점이 이해되고 나면 춘원의 위의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징하게 안전에 잡혀옵니다. 춘원이 도달한 지점은 결코 만만한 지점이 아니며,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던 춘원의 간난신고의 어려운 삶에 반전의 기회로 다가온 것이 천도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전해 다니던 친척집의 팔촌형제 가운데 이학수 즉 나중에 운허스님이 되는 분이 있었고, 어려서부터 그와는 춘원이 의기가 투합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춘원은 『거룩한 죽음』이라는 단편에서 천주교 교주가 사형당하는 모습을 아주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그려내고 있습니다. 춘원과 동학과의 관련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본 유학을 가서 춘원이 접하게 되는 게 기독교입니다. 하숙집 주인이 일본인 목사였다고 하고, 후에 춘원이 입학하는 메이지 중학교도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습니다.
춘원이 얼마나 독실하게 깊이 기독교를 믿었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그의 작품들 속에서 언급된 언사들 속에서 추정해 볼 때 그가 기독교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고, 진심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춘원은 누구보다도 도산 안창호를 존경하고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산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도산이 설립한 독립운동기관인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도산이 면접을 행하는 가운데 당신의 종교는 무엇인가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춘원은 기독교라고 대답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흥사단에 무사히 가입하기 위해서였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당시는 춘원이 기독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점에서 춘원이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동안에는 춘원은 내내 기독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의 마음의 지주가 그곳에 있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6개월 만에 출소하여 나왔을 때 세상은 춘원을 백안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변절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춘원만은 너무도 일찍 감옥을 출소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춘원은 공식적으로 불교에 귀의했음을 세상에 알립니다.
이런 면에서 보더라도 독립운동에 매진할 동안의 춘원은 기독교에 기울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봅니다.

1930년대 중후반 불교에 귀의한 이후 춘원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불교 신자였습니다.
해방되고 나서 4년 반여년 동안 춘원은 남양주 광릉을 시야에 두고 있는 봉선사에 칩거하여 있었습니다. 그때의 생활상을 담은 문집 『산중일기』가 출간되어 나와 있습니다.
춘원이 광릉 봉선사에 칩거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봉선사 주지가 다름 아닌 운허스님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운허는 춘원의 친척동생으로 어려서 함께 놀며 수학하던 사이이고 젊은 시절에는 만주로 나가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도 했던 형제요 동지이기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말년에 ‘부처님에로의 길’이라는 또 같은 길을 걷게 된 도반이라 할 수도 있는 사이였으므로 춘원이 봉선사라는 절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세상의 색안경은 다른 측면이 더욱더 부각되어 있는 듯도 합니다. 당시 춘원이 ‘반민특위’의 추적을 당하고 있었고, 이를 피해 잠시 몸을 숨기기 위한 필요에서 운허스님이 있는 봉선사를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하여튼 춘원은 해방 후 봉선사에 몸을 담았고, 거기서 진짜 속세를 등진 수행자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던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거기서 춘원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깨우쳤는지는 사실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단편 단편적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접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남겨놓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입니다. 거기서 그는 이 책에 소개되는 『꿈』을 썼고, 『원효대사』를 탈고했으며, 명문의 수필집 『산중일기』를 완성했습니다. 그 모두가 수작이요 주옥같은 작품들입니다.
춘원의 봉선사 생활의 끝은 결국 ‘반민특위’ 재판에서 패소하고 감방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곧 6.25 전쟁이 터지고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인민군에 잡혀 북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일반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아무래도 춘원의 일생은 행복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파란만장하였으나 결코 행복했다고는 하기 어려운, 그런 간난신고의 것… 사람을 몹시 지치고 힘겹게 하는 삶의 과정이 대체로 이와 같다고 봅니다.
그러나 춘원이 말년에 도달한 그 깊이와 성취만큼은 우리가 곰곰이 다시 살피고 재음미해 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것은 분명 ‘신성의 탈환’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재탈환’이라고 할까요. 그런 가슴 뿌듯하게 하는, 두근두근 가슴 뛰게 하는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신성의 탈환’ 내지는 ‘신성의 재탈환’이라면 춘원은 어쩌면 목적지에 도달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한평생 고아처럼 방황하며 찾아 헤매다녔던 그것을 말입니다.
춘원은 그것으로서 충분했던 게 아닐까요. 충분했던 거라고 봅니다.
춘원을 욕하고 매도할 명분 따위, 이제 우리에게는 남아있지 않다고 사료됩니다.
- 이 가을(2024년), 글의길(글도)의 편집실에서
이광수(1892.03.0.4-1950.10. 25.);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
며 애국계몽운동가이다. 최남선과 함께 거론되는 초창
기 한국의 근대문학을 이끌었던 우리 근대문학의 일세
대인이다. 호는 춘원(春園).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
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임정 기관지 『독립신
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일제 강점기 언론
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
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순한글체 소설
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이
며, 소설가로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청소년과 남
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
의 3대 천재로 불리는 인물이다. 임정시절 도산 안창호
와 깊은 교류가 있었고, 1921년 안창호의 우려를 뒤로 하
고 경성으로 돌아온 그 다음해(1922년)에 『민족개조론』을
『개벽』(5월호)지에 발표 논란이 일었다. 그는 1917년 『무
정』을 기점으로 하여 평생에 걸쳐 『흙』 『단종애사』 『유정』
『사랑』 등을 꾸준히 발표하며 한국문학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와 더불어
옥고를 치르고 6개월 만에 풀려나오나, 안창호는 그 사
건을 계기로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해방 후 반민특위
법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안창호의 일대기를 썼고, 그의
대표작 가운데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1950년 납북되었
다가 폐결핵으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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