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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장기

이번에 출간하는 저희 글도출판사의 근대문학작가선은 춘원 이광수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언젠가 저희 출판사가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에서 두 번인가 이광수 문학에 대하여 다루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느낀 바이지만 춘원 이광수의 문학은 참 칭송과 마타도어가 심하게 교차하는 영역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칭송이야 춘원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니 문제 삼을 일이 없다 하겠으나 마타도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감상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춘원 이광수 문학에 대한 오해는 이를 문학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이거나 문학 외적인 관점에 입각해 접근해 들어간 탓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혹자는 정치적이 아니라 민족적이라고 우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민족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
이번에 출간하는 저희 글도출판사의 근대문학작가선은 춘원 이광수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언젠가 저희 출판사가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에서 두 번인가 이광수 문학에 대하여 다루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느낀 바이지만 춘원 이광수의 문학은 참 칭송과 마타도어가 심하게 교차하는 영역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칭송이야 춘원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니 문제 삼을 일이 없다 하겠으나 마타도어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감상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춘원 이광수 문학에 대한 오해는 이를 문학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이거나 문학 외적인 관점에 입각해 접근해 들어간 탓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혹자는 정치적이 아니라 민족적이라고 우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민족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정치적 용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민족은 정치영역 안에서는 일응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영역을 넘어서는 제약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긴, 춘원이 민족의 선각자요 민족의 지도자 가운데의 한 분임이 틀림없다고 한다면 이런 비판, 마타도어에 서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필자 개인적인 선호로는 춘원 이광수는 무엇보다도 먼저 작가요 소설가였지 싶습니다. 춘원이 선택한 가장 원초적인 삶의 방식은 작가로서 사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춘원은 그가 선택한 이 삶의 방식에 충실했고 크게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척박한 시대에 이만한 성과를 내었다는 것, 후대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봅니다….
춘원에 대한 오해는 물론 정치적 접근 면에서 말고도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춘원은 장편소설 작가이지 단편소설과는 거리가 있다는 착각입니다. 흔히 춘원의 『무정』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인식하고 1930년대에 들어와서 이태준 등의 구인회 멤버들의 단편소설들을 두고 근대소설이 완성되는 시점으로 봅니다. 이런 시각이 춘원을 장편 작가로 집중케 하고, 그가 단편에서 소략하다는 인상을 심는데 일조한 관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춘원은 『무정』, 『유정』, 『사랑』, 『꿈』, 『흙』, 『단종애사』 등등의 훌륭한 장편소설을 썼고, 당대 가장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쓴 장편소설의 분량과 비교해서 볼 때 그의 단편소설의 분량은 현격히 소략하고 그의 주된 창작의 길에서는 번외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임에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춘원 본인이 창작한 장편소설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고 다른 작가들의 그것과 비교해서는 결코 소략하다거나 적은 분량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완성도도 1930년대 근대문학의 완성을 보여준다는 구인회 문학의 단편소설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시인 주요한도 그런 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920년대에 비하여 1930년대의 춘원 선생의 단편은 완벽을 이룬 작품들이 배출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38년에 집필하여 1939년 1월 월간 『문장(文章)』 창간호에 발표된 「무명(無明)」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춘원은 적지 않은 수의 중단편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감방 안에서의 죄수들의 일상을 그린 「무명(無明)」에서부터 동학 교주의 죽음을 다룬 「거룩한 죽음」 그리고 당대로써는 특이한 남성 간의 동성애를 다룬 비극적 짝사랑 이야기 「윤창호」 같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소재나 주제 면에서 공히 폭넓은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소재의 대부분이 춘원 자신이 직접 경험했거나 근거리에서 보고 듣고 한 사건 사실들의 소설화요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문체 면에서도 단편만이 지닐 수 있는 그 긴장성과 압축성이 잘 도드라져 있습니다. 장편에 비하여 상당히 세련되고 예술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1920년대 초창기 단편들에서는 아직 문체상의 고어성이라든가 사고와 문체간의 괴리 같은 게 느껴지고 있습니다만 1930년대로 넘어서면 고어성을 탈피하고 문체를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 근대소설의 완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구인회 문학의 단편소설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며,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소재의 다양성이라든가 주제를 소화하는 면에서는 이를 크게 능가하고 있다는 판단도 들게 합니다.

「육장기」에서 아마도 춘원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화자를 통하여 춘원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젊어서는 민족의 살길이라 해서 민족개조도 하고 교육론도 펼쳐보고 하였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거기에 부처님이,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되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신은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게 과거의 자신이 했던 일들을 진실로 성사시키는 핵심이라고 하는 의미를 함축한 고백이었습니다. 다음에 짧게 그 문장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것이 어떻게 피상적인 것도 알았고, 십수년 계속하여왔다는 도덕적 인격개조운동이란 것이 어떻게 무력한 것임을 깨달았소.… 신앙을 떠난 도덕적 수양이란 것이 헛것임을 깨달은 것이오.”

그러나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육장기」 전체의 분위기는 기독교적이면서 또 불교적이고 토속적입니다. 불교적 시각에서 예수의 하나님을 받아들인 건지 예수의 시각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건지 헷깔리게 합니다. 하여간 그런 분위기입니다만, 다른 단편 「길놀이」에서처럼 인생의 연륜이 깊게 느껴지는, 웬만한 일상의 일들에는 초탈해진 관조의 경지에 이른 그런 높은 수준의 작품입니다.
「난제오」 역시 그와 같습니다. 전반부는 병들어 입원한 아내를 문안 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화자의 현실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여럿 에피소드를 통해 설득력 있게 드러나고, 화자가 느끼고 직면한 현실의 고통을 독자들로 하여금 십분 공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찾아간 절간에서 한 선사를 만나게 되고 그와의 우문현답을 통하여 마음에 찾아드는 어떤 안정과 희열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 희열감의 정체가 다름 아닌 사일난제오(斜日亂啼烏)였습니다. 선불교의 오래된 화두 가운데의 하나라고 하는데, ‘내가 바로 석양에 지저귀는 까마귀다.’ 하는 뜻이라 합니다. ‘하늘은 광활하고 고요한데 까마귀 저 혼자 시끄럽다는 의미인가요?’ 좀 더 불교의 색채가 짙어진 감이 드는 작품입니다.
춘원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춘원은 오십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종교에 귀의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그의 장편 『꿈』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30년대 그의 단편들을 보면 그 사정을 더욱 확실하게 캐치하게 됩니다. 그가 귀의한 종교가 어떤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습니다. 「육장기」에서 신앙이라고 하고 있긴 한데, 그 접근하는 방식은 매우 부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이 혼조합니다. 불교에 물든 예수님의 하나님을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예수님의 하나님에 물든 부처님을 받아들인 건지 소설 속에서는 애매모호한 게 사실입니다. 어쨌든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그 존재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확실히 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민족개조든 교육이든 무엇이든 신이, 부처님이, 하나님이 없어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육장기」의 화자는 자신의 과거를 둘러보며 여태껏 헛짓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며 애국계몽운동가이다. 최남선과 함께 거론되는 초창기 한국의 근대문학을 이끌었던 우리 근대문학의 일세대인이다. 호는 춘원(春園).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일제 강점기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한 인물이며, 소설가로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청소년과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는 인물이다.

임정시절 도산 안창호와 깊은 교류가 있었고, 1921년 안창호의 우려를 뒤로 하고 경성으로 돌아온 그 다음해(1922년)에 『민족개조론』을 『개벽』(5월호)지에 발표 논란이 일었다. 그는 1917년 『무정』을 기점으로 하여 평생에 걸쳐 『흙』 『단종애사』 『유정』 『사랑』 등을 꾸준히 발표하며 한국문학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와 더불어 옥고를 치르고 6개월 만에 풀려나오나, 안창호는 그 사건을 계기로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해방 후 반민특위법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안창호의 일대기를 썼고, 그의 대표작 가운데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폐결핵으로 병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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